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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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먼 데에 대한 그리움(Fernweh), 어디론지 멀리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die Heimatlosen)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 감금되어 있다.
*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생활의 서서한 파괴 작용과 둘만의 권태에 의해서 죽이느냐
또는 사랑을 지닌 채 죽느냐의 양자 택일밖에는 남겨지지 않는다.
* 그들의 테마는 예술이다. 어디선지 모르게 그림이 그려지고 있고, 조각을 쪼고 있고, 시가 쓰여지고 있는 곳.
감수성 있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누구나 가질 청춘과 보헴과 천재의 꿈을 일상사로써 생활하고 있는 곳,
위보다는 두뇌가, 환상이 우선하는 곳, 이런 곳이 슈바빙인 것 같다.
* 공부할 때와 사랑할 때를 분명히 분간하고 긴 설명 없이 사랑하지 않느냐고 의향을 묻고
그 대답이 노(Nein)인 경우에는 서슴없이 다시 인식에 몰두하거나 딴 대상을 찾는 그들.
* 나도 집시처럼 정처없이 춤과 노래와 사랑과 점치는 일로써 생활하면서 온 세계를 방랑했으면!
* 결국 누구나가 자기의 개성에 일치하는 자기의 성도덕을 발견하면 된다는 것이다.
* 내가 미치도록 그것이 될 것을 원했던 것으로 되는 대신에
자기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가장 의외의 방향으로 어느새 자기가 형성되어 버린 것을 발견한다.
*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잘 안다.
* 부모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 타인이 둘이 모여서 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돌연 행복을 발견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듯한 태도로 임한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충분히 불행했고 여러 가지 문제에 싸여 있던 것이다.
그런 복잡하고 문제에 넘친 불행한 양인이 모였다고 해서 돌연 인간의 행복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 니나는 결국 니나대로 행복한 여자인 것이다.
* 니나는 마치 폭풍우에 좀 파손된, 그러나 큰 바다에 떠 있고 바람을 맞고 있는 배와도 같았다.
그리고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배가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것을
아니 새로운 대륙의 새로운 해안에 도착해서 대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을 돈을 걸고 단언할 것 같았다.
* 경제적 독립이 정신적 독립을 뒷받침해 준다.
* 정화는 늦되던 올되던 나에게는 절대인 것이다.
* 우리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또 요구할 수도 없다.
아이가 우리에 의한 존재이고 우리의 것이나 동시에 자유로운 의식이고 절대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체성에 눈이 뜬 후의 아이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정뿐인 것이다.
* 나는 영원히 영원히 정화 속에 사는 것이다.
* 부모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교육 목표라는 것은 생각해 보면 역사적인 진리다. 완전한 아이에게 부모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부모는 자기가 무로 되기 위해서 아이를 기른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무로 된 순간에 그 교육은 완성되는 것이다.
* 결벌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일생에 한 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나간다.
* 나도 언젠가는 무엇이 생에 있어 중요한 지를 알아내고 싶다.
* 나는 차라리 요리, 세탁, 다리미질, 뜨개질을 배웠어야만 했다.
도대체 역사, 지리, 영어, 국어 등의 좋은 점수와 세상의 비실재적인 것들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나는 차라리 성경이나 요가를 공부했어야만 옳았다. 혹은, 재능이 있다면 그림을 공부했어야 했다.
* 아, 나는 인간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겠다. 그들은 돌로 머리를 쳐서 자살을 하지 않도록, 어떠한 미혹이 무조건 필요하다.
종교와 술과 사랑과, 혹은 일종의 자기 찬미가, 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처럼 자신을 미혹시킬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 여자가 훌륭해 지려면 여러 가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그걸 방해하고 있다.
* 언제나 언제나 너 자신이어야 한다. 아무 앞에서도 어디에서도…….
* 직접적이고 수공업적인 나날의 땀, 집중과 하루에 적어도 7, 8시간이라는 노동시간을 요구하는 그런 일을 맡고 싶다.
노동하고 싶다. 꿈꾸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인텔리는 되고 싶지 않다.
* 언제나 '너'를 찾으려던 우리의 시도는 '나'를 다시 찾은 것으로 끝나고 만다.
*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부모는 아이에 진다. 왜냐하면 아이의 의견도 안 묻고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그들의 과실 때문에…….
* 어떤 자연도 그것이 우리의 내면의 풍경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에는 아무런 감정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베니스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베니스에 불과한 것이니까.
* 결국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정신에서 뿐이고 정신의 자유란 예술을 뜻하는 것 같다.
* 전체적으로 인간은 그가 가장 피로하게 만들고 있는 육체의 기관과 꼭같이 강하고 건강하다.
즉, 그의 가장 약한 기관이 생명을 결정한다.
스물 즈음 읽었던 전혜린 에세이는
너무너무 어렵고 뭔지 모르겠지만 멋있는 그런 글이었다.
서른 둘이 된 올해 초, 엄마 집의 옛책장을 둘러보다가
이제는 서른 둘에 자살한 그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그녀가 '먹고 사는 문제, 여성의 삶, 정신적인 삶, 격정적인 삶, 생에의 의지'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는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삶은 그냥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갈 때 잘 살아지는 것이지
너무 곰곰히 생각에 빠져들면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 그녀가 예찬한 슈바빙(Schwabing)에 가보고 싶다.
-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대해 그녀가 쓴 글이 무척 마음에 든다.
니나가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이었나. 다시 읽어봐야겠다.
- 50~60년대의 삶은, 집안 좋고 흔치 않게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인 그녀에게도 매일 '먹고 사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집안이 가난하고 더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의 생활은 얼마나 더 처참했을까.
- 그녀 또한 현재의 나와 다르지 않게 직업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한다.
이 또한 인간 보편의 고민인걸까.
- 이십대 초반에 전혜린의 글을 읽을 땐 대체로 '격정적인 삶'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 밑줄을 그었다.
삽십대 초반의 나는 사랑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귀 기울였다.
그녀의 말 처럼 베니스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베니스에 불과하니까.